본문 바로가기
알쓸잡학 - 역사, 건축, 문화 etc.

칭다오 맥주 탄생의 아픈 역사

by 성북동 도호 2021. 6. 15.

칭다오 맥주 탄생의 아픈 역사

 

우리가 단순히 "양꼬치에 잘 맞는다"로만 알고 있는 중국 칭다오 맥주!

칭다오 맥주도 알고 보면 탄생과정에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늘은 그런 칭다오 맥주의 탄생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 침략과 더불어 1897년에 독일 군대 역시 청나라에 침공을 한다.

독일이 중국에 진출한 것은 청일전쟁 직후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 비하면 한발 늦었다.

그리하여 독일의 '빌헴름 2세'가 눈독을 들인 것이 산둥성 남부의 '자우저우만'이었다. '칭다오'를 비롯한 자오저우만 일대는 당시 인구가 1만 명도 되지 않는 한적한 어촌이었다. 굳이 그곳을 침략할 만큼 경제적 가치가 크지도 않았고, 다른 열강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독일은 '칭다오'라는 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중국과는 99년간 '자오저우'만을 빌린다는 내용의 조차 조약을 체결하지만 실제로는 식민지배나 다름없었다.

 

※1. 칭다오의 위치 : 산둥반도 남안 '자오저우만'의 만구(灣口 / 만의 입구)에 위치함

※2. 만(灣) : 바다, 호수 등의 큰 물이 육지쪽으로 곧장 들어온 곳

 

'칭다오'에 정착한 독일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한 것은 고향의 맥주였다. 외국에 나간 한국 사람들이 김치를 그리워하듯, 그들에게 맥주는 고향의 맛이었고 향수병을 달래주는 약이었다.

그때 한 독일 사람이 해안에 우뚝 솟은 '라오산' 산에서 나오는 깨끗한 광천수에 주목하게 된다. 맥주를 만들기에 그만한 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영국 상인과 합작해 1903년 '로망맥주칭다오주식회사'를 세우고 독일에서 생산 설비와 원재료를 들여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칭다오' 맥주는 생산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독일 뮌헨 국제박람회에서 금상을 따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칭다오' 맥주는 독일의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1949년 중국 공산당 정부에 의해 국영기업으로 바뀌어 지금의 '칭다오맥주유한공사'가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짙게 스며있는 '칭다오' 맥주는 이제 900만 칭다오 시민들의 자랑이자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칭다오'는 2017년 세계브랜드연구소가 발표한 '중국 500대 브랜드 가치'에서 14년 연속으로 맥주업계 1위를 차지했다. 150가지 맥주를 세계 70개국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으로도 세계 6위다. 이런 브랜드 가치를 내세워 '칭다오'는 자국 시장에서도 고가 수입 맥주들처럼 고급 '프리미엄'을 강조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쉐화, 옌징, 하얼빈 맥주는 중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없는 3대 브랜드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많이 팔리면서도 소비자들에게 후한 점수를 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국 맥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댓글